ONE DAY

PARK SUNGHO
약관을 넘어 시작된 믿음의 삶에서 그날, 성령님은 내게
치유, 기름부으심, 기쁨, 권면, 가르침, 애통, 위로하심으로 다가오셨다.
성령님의 기름부으심

내게 성령님의 기름부으심 과정은 좀 특이하다.

94년 4월 6일, 짐짓 하나님을 위협(?)하여 얻어낸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다. [ 이야기 링크 ]

찬양을 크게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내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찬양의 전주가 흐르는 네 마디의 시간은 태초의 혼돈과 같았다.

주일예배만 참석했던 이 작은 예배당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찬송을 부르면 내 목소리는 묻혀 티도 안 날 줄 알았는데 처음 참석한 수요예배엔 교인이 몇 명 없다.

할머니 두 분은 목소리 기력도 없으시고 다른 한두 사람도 입 모양만 벌릴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찬양을 크게 한다는 건 내 독창 무대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해? 말어? 해? 말어? 해? 말어?"

네 마디 전주 동안 나는 우주의 찰나 속에서 수천만 겹의 고뇌를 거쳤다.

"그래, 하나님과 약속했지 않은가? 나의 어릴 적 트라우마로 생긴 노래를 기피하는 PTSD는 비겁한 변명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자."

라는 결심을 하고 입을 벌려 "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외쳤고 성령님은 내가 "주"라는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모으는 순간 내 영혼육에 기름부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셨다.

첫 번째, 성령님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게 하셨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영과 혼과 육신을 이루는 원자들이 그분 앞에 죄로 인해 떨고 있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원죄'라는 놈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고 내가 살며 죄를 지어봐야 얼마나 지었다고 죄인으로 규정하는지 마뜩지 못했던 그 '죄'라는 것이 내 온 영혼육으로 느껴졌다.

아쉽다. 화가 난다. 그 영광과 거룩함을 이 정도 수준으로밖에 표현 못 하는 내 문학적 소양의 부족함이 원망스럽다.

나는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임을 하염없이 뜨겁게 고백했다. 그러자, 성령님의 거룩하고, 정결하며, 자애와 긍휼의 무한하신 사랑의 기운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두 번째, 성령님은 내게 행복을 깨닫게 하셨다.

"성호야! 이래도 네가 나를 없다 하겠느냐, 네가 없다 하던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정말 행복했다. 하나님이 직접 당신임을 내게 말씀하시고 나를 감싸 안으심 속에서 난 그토록 찾던 행복을 찾았다. 기타를 잘 치면 행복할까, 예쁘고 착한 여자 친구를 사귀면 행복할까, 글씨를 잘 쓰면 행복할까 등 ... 20여 년 동안 여러 모양으로 행복을 찾아 헤매던 내게 행복은 보이지 않았다.

깊은 노력 끝에 기타로 애창곡을 멋지게 연주하고 주변 친구들의 부러움과 동경을 가지더라도 그 기쁨은 순간의 성취감으로 끝나버리고, 난 다시 더 높은 수준의 연주를 갈망하며 목말라하다 기타를 놓아버렸다.

예쁜 여자 친구를 사귀면 행복할 것 같아 용기 있게 여자들에게 다가가 어필하여 사귀어도 보았으나 그 행복도 목적을 달성했다는 성취감을 가지는 순간부터 희미해져가기 시작한다.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친구를 보니 그 친구가 행복해 보였다. 은마상가에서 아르바이트하여 난 더 멋진 오토바이를 구매해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그 또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었다.

참된 행복에 목말라하던 나는 '이 땅에 행복은 없다. 행복이란 놈은 성취라는 놈이 가면을 쓰고 사람을 홀리는 것이다'라는 상황적 결론에 다다를 즈음 그날! 성령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만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이고, 천국이구나. 정말 이 행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구나."

그 기름부의심의 거룩함, 사랑과 긍휼, 영광과 자애로움을 이따위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비통을 금치 못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13:44" 비유처럼 나는 오늘 죽음 이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행복을 꿈꾸며 이 땅의 것은 다 내려놓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